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성황후/호칭에 관한 주장들 (문단 편집) == 명성황후 추존황후론 관련 == 일부 주장에 따르면 명성이라는 시호를 받은 후에 황후로 "추존"되었는데, 추존된 호칭은 부르지 않은 것이 관례임으로 명성황후가 아니라 명성왕비 또는 명성왕후로 불러야하고, 이는 뮤지컬 명성황후와 KBS 역사드라마 명성황후의 영향에 따른 전혀 근거가 없는 호칭이라고 주장하면서 명성왕후를 명성황후로 부르려면 흥선대원군도 흥왕으로 불러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명성황후/생애]]에 서술된 바대로 고종은 을미사변이 터지고 난 후에 공식적으로 중전의 사망을 백성들에게 발표하지 않았다. 임오군란 당시에 경복궁을 탈출한 중전 민씨가 여주를 거처 충주까지 대피하였다가 몇년 후에 경복궁으로 환궁한 사실과 경험을 고종은 이미 겪었었기에, 을미사변이 일어났어도 중전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고종으로서는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러한 희망과 기대가 중전 민씨의 사망선포를 즉각 실시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다만 이러한 고종의 속내는 감추고 아관파천 이후에 김홍집 내각의 몰락하자 김홍집 내각에게 사망반포를 하지 못한 책임을 돌렸다.[* 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2월 11일 양력 5번째기사, "역적들이 명령을 잡아 쥐고 제멋대로 위조하였으며 왕후(王后)가 붕서(崩逝)하였는데도 석 달 동안이나 조칙(詔勅)을 반포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따라서 중전 민씨의 사망은 황후 책봉보다 먼저였지만, 사망 발표는 황후 책봉 이후였다는 점 때문에 이것이 책봉인지 추존인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